돈밖에 모르는 양심 없는 괴물, 작은 언니

2024. 11. 4. 07:22나의 가족 이야기

올해 난 나의 형제들에 대해 알아간다. 
내가 형제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고, 그들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 
 
"네가 형제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말은 마치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할 수 있게 해 준 말이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형제가 없었다면 훨씬 더 잘 살았을 것 같은데..."
 
그 말은 마치 깊은 잠에 빠졌던 내가 현실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작은 언니네 살았다. 
작은 언니는 게으르고 욕심 많고 잔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다. 
 
살림이라고는 하지 않고 밤새 게임을 하고 아침이 되면 잠을 잤다. 
조카도 잘 돌보지도 않았다. 
내가 있으니 아이의 엄마가 베이비 시터를 구해야 하는 고민도 없고, 경제적 부담도 없이 언제든 나에게 맡기고 나갔다. 어린 조카는 엄마가 언제 올지 베란다에 나가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는 "내가 나갔다 온 것, 형부한테는 말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때는 어렸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2002년부터 번역회사를 시작하고 작업이 많이 들어와서 돈을 꽤 많이 벌었다. 
나는 10년 정도 되니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언니는 파주의 49평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우리가 살던 34평 아파트는 전세를 놓고, 압구정에 딱지가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나올 때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작은 언니는 큰언니에게 말해 엄마에게 내가 있을 곳이 없다며 아파트를 사라고 했다. 마치 나를 위하는 것처럼. 
 
그 후 나는 나의 가난이 허무의 원인인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의 가난에 대해 종교와 학문으로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미국에 가서 사회학 청강도 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때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던 중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나에게 마치 천국과 같았다. 따뜻한 날씨와 나른한 분위기... 
그런데 갑자기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몇 시간씩 가서 일을 하고도 하루에 2천 원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부족함이 없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의 욕심이 이 불평등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곳에서 살았던 집주인 언니의 남편은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오래 근무하신 분이었다. 그 언니는 정말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 아침에 집 정리를 깨끗하게 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갔다. 작은 언니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가끔 집언니와 이야기를 할 때면, 집주인 언니는 "나는 이 모기지를 언제 다 갚냐?" 하며 지나가는 푸념을 했다. 당시 그 집은 7억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네가 형제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말을 듣고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큰언니가 몇 달 전 통장을 보라며 자기가 나에게 보낸 것이 내가 보낸 것보다 두 배는 많을 거라고 했다.  나는 만약 큰언니가 더 많이 보냈다면 갚아야 하니 통장을 확인해 보았다. 언니의 말과 달리 나와 언니는 거의 비슷하게 보냈다. 나는 엄마에게 보낸 돈도 확인했다.
 
2006년인가 7년 정도에 엄마가 나에게 아파트 하나를 증여해 주었다. 나는 결혼도 안 한 무능한 딸에게 엄마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큰 언니의 차를 타고 가는데 큰 언니가 물었다. "엄마는 왜 너한테만 증여를 해 준 거야?" 
 
그리고 언니가 통장을 확인해 보라는 말에 나는 그 답을 얻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엄마에게 보냈던 돈에 대한 엄마의 마음이었다. 엄마는 그 아파트를 5천에 샀고, 나는 그 아파트는 3억 5천이 되었을 때 그 아파트를 팔았다. 엄마에게 보낸 돈의 대략 7배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엄마와 큰언니한테 보낸 돈이 내가 그 10년 동안 벌었던 1/4일 정도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냥 내 돈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한 것으로 만족이었다. 
 
그러면 1/2는 어디로 갔을까?
비용을 1/4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나머지 1/2은? 
작은 언니네 집에서 나올 때 나에게 꼬리표가 하나 붙었다. 
"외식 좋아하는 애."

외식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외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언니가 제대로 살림을 하지 않으니 매번 내가 밥값을 냈다. 당시는 배달앱도 없고 카드 결제도 되지 않아 현금으로 다 냈다. 돈을 내다가 가끔 그렇게 내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가족한테 쓰는 돈은 아까운 게 아니야.'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작은 언니가 학원에서 일할 때 조카를 봐주는 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그때도 작은 언니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고, 그 어떤 작은 사례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언니를 차로 데려다주고 언니가 배가 고플까 봐 학원 앞에서 밥을 사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제 언니에게 내 몫을 달라고 했다. 
작은 언니는 대답했다. 
"네가 우리 집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너한테 받은 돈이 없으니 줄 거 없어."라고 했다. 
그러더니 "자기는 양심의 가책을 하나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했다. 
 
며칠 전 법률신문에서 오래 일하신 분께 나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말했다. 
"둘째 언니가 욕심이 많고, 잔머리를 쓰는 사람이네. 요즘 아버지한테 잘하지 않아?"
나는 그분의 말에 놀라서 "어!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말했다.
"안 봐도 뻔하지." 그분의 대답이었다. 
나는 세상에는 내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 상황과 정황을 아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에 생각이 난 사건이 있다. 
작은 언니는 영어학원을 인수한 적이 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왜 영어학원을 인수했지?'
나를 불러 몇 달을 같이 다녔다. 
그때는 그 학원이 내 학원인지도 몰랐다. 
나는 기름값도 받지 않고 언니를 태우고 다니고, 내 돈으로 밥을 사서 조카와 함께 먹었다. 작은 언니는 매달 몇 백 씩 챙겨가면서도 밥 한 번 산 적이 없었고 내가 치킨을 시키면 또 시키냐고 핀잔을 주고 나보다 더 많이 먹었다. 그 학원에 영어선생이 있어서 내가 굳이 그곳에서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한 달 후 엄마가 전화가 왔다. 
"내가 미국에서 왔을 때 할 일이 없을까 봐 네 학원으로 인수했다는 데 왜 안 가." 
내가 가도 할 일이 없다고 하니까 엄마는 내 학원이니  가서 도와주라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약했다. 엄마가 걱정하는 것이 싫었다. 큰언니와 작은 언니는 내가 엄마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나에게 말하지 않고 엄마를 이용했다.  
 
나는 다시 작은 언니의 학원에 갔다. 원장과 선생이 있는 학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의 태도는 엉망이었다. 나는 데스크에서 몇 달을 앉아 있었다. 물론 무급으로. 심지어 그때도 기름값과 밥값도 내가 내면서. 
 
겨울방학 특강을 했다. 번역을 그것도 논문 번역을 20년 한 사람에게 한 아이당 특강료를 7만 원으로 책정했다. 그것이 그녀의 수준이었지만, 언니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가르쳤다. 
 
나중에 작은 언니한테 나한테 얼마나 줬냐고 하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받은 건 다 줬어."
그 말이 너무나도 역겹게 느껴졌다. 
 
정확한 금액이 아니라 "다"라는 말을 했다. 솔직히 그 말을 믿을 수도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원에서는 한 달 원비를 특강비로 책정하는 것이 보통인데 셈이 빠른 언니가 그러지 않았을 리 없다.
 
참고로 나는 고1 때 3 등급 하던 학생이 고2가 되어 전교 3등으로 1등급이 되었다. 나와 3개월을 공부하고 상산고를 간 학생은 몇 년 간 적체되어 있던 TEPS 점수가 한 번에 100점 이상이 높아졌다며 감사하다고 연락을 했다. 동산고를 간 학생은 영어공부에 시간을 많이 쏟아도 되지 않아서 다른 과목을 공부할 수 있는 가용시간이 많아져 감사하다고 했다.
영어과목의 학생수가 줄어간다고 나를 고용한 한 학원에서 내가 인수받은 학생수는 19명이었고, 세 달 만에 40명으로 늘었다. 
 
나의 언니가 하는 학원이 아니었다면 그런 곳에 가지도, 그런 보수를 받고 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언니였기에 그렇게 최선을 다해 봉사해 주었다. 그런 나에게 받은 것은 다 주었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언니라니...   
 
특강이 끝나자 작은 언니는 나에게 고등학교에 가는 학생과 그 학원에 제일 오래 다닌 학생을 가르치라고 했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의 양심 상 고등학교에 가는 학생은 그 프랜차이즈에서 나오는 월별 교재로 가르치기가 어렵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 그 학생이 만날 영어의 수준을 아는데 그 학원의 교재로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작은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교재는 그것으로 해. 편부가정이라 교재비가 오르면 학원을 끊을 수도 있어."
 
내 학원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것을 작은 언니와 실랑이를 벌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 날부터 나가지 않기로 했다. 작은 언니도 그러라고 했다.
 
한두 달이 지나고 언니는 수 천만 원의 권리금을 받고 그 학원을 팔았고, 나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사례비도 없었다. 나는 나를 위해 인수한 학원에서 무급으로 아이들을 관리해 주고, 조카에게 밥을 사주고 (엄밀히 말하면 밥이 아닌 치킨이다), 작은 언니가 원하는 시간에 집에서부터 학원까지 편하게 돈 한 푼 안 받고 기사노릇을 해주었다. 그리고 언니는 매달 몇 백에 수 천만 원의 권리금까지 챙겼다. 
 
또다시 몇 년 후에 작은 언니는 학원을 인수하며 함께 하자고 했다. 그 학원에도 고등부 선생님이 있었고 나는 또 할 일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언제나 그렇듯 내가 만두를 샀다. 내 것, 언니 것, 고등부 선생님 것 이렇게 세 개를 샀다. 고등부 선생님이 교실에 있어서 갖다 주고, 나는 원장실에서 언니와 먹으려고 만두 뚜껑을 여는데 언니가 말했다.
 
"이제 영어 선생님 것은 사지 마. 자꾸 사주면 버릇돼."

내가 밥을 먹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 밥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때도 나는 그냥 언니가 원장이니까 운영비에 대해 걱정하는가 보다고 생각했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가족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그날도 나는 언니에게 내가 할 일도 없으니 내일부터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도 작은 언니는 알겠다고 했다. 
 
큰언니가 나에게 그 집에 얹혀살아서라는 말을 하고, 몇 년 뒤 큰 언니는 작은 언니 학원에 나가지 않은 일을 말하며 나에게 형제 등에 칼을 꽂은 년이라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집에 얹혀산 적이 없었다. 내가 그 집에 있는 동안 돈을 잘 벌 때라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내가 결코 그들의 재산을 축낸 적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억울한데 내가 무언가를 잘 기록해 놓는 사람이 아니라서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사업자라서 세무서에 신고한 내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에서 2012년까지 내가 벌었던 돈을 계산했다. 4억 5천이었다. 엄마가 증여해 준 아파트가 7배가 되었다. 그 아파트의 위치는 그리 좋지 않아서 상승률이 다른 곳보다 적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럼에도 그 아파트의 상승률로 단순 계산을 해도,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  벌었던 돈은 현재의 돈으로 30억 정도 된다. 그중 10억은 비용으로 처리한다 하고, 엄마와 큰언니에게 7억을 주었다고 하면, 나머지 13억은 그 집에서 썼다. 그리고 조카도 돈 한 푼 안 받고 봐주었고, 조카가 5학년 때 회사원의 빠듯한 삶을 말하며 조카와 조카의 친구들에게 거의 무료로 과외도 해주었다. 자기 남편이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것을 동생의 재능과 피를 빨아 메웠다. 이런 나에게 얹혀살았다는 말을 하다니!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작은 언니에게 따졌다. 그리고 그 말 끝에 "큰언니 피도 그만 빨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나를 차단시켰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버는 족족 밥값을 냈으니 나는 내 자의적으로 사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돼버리고, 그것을 10년 하니 나는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반면 그들은 밥값을 아끼고, 돈도 안 내고 아이를 맡길 믿을 만한 사람이 있었으니 집이 세 채가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집에 얹혀산 것일까?
 
내가 무언가를 잘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고 친구도 별로 없고,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까 작은 언니는 그 점을 이용한 거였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내 동생을 10년을 데리고 있었어"라고 하면, 그녀는 동생을 데리고 산 착한 사람이 되고, 나는 얹혀산 년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밥값을 낸 이유는 작은 언니는 나에게 매번 이렇게 묻고 대답했다. 
"네 형부 연봉이 얼만 줄 알아? 2천이야."
그러면 나는 지갑을 열었던 것 같다. 
나는 2천이라는 연봉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 적은 돈으로 가족이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많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설마 우리 언니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말을 믿었고, 그 말이 10년 간 내가 그 집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그녀는 나의 선한 마음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을 이용했다. 
 
한 카페 사장님과 작은 언니네 살았던 일을 말했다. 
그랬더니 그 사장님이 말했다.
"솔직히 먹는 게 제일 많이 들어가는 건데." 
 
작은 언니로 인해 큰언니와의 거리도 멀어졌다. 작은 언니가 잘 쓰는 말인 "구워삶아서" 큰언니는 F라서 나에게 와서 욕을 해대기 시작한 것 같다. 그것은 큰언니가 나에게 많은 돈을 쓴다고 생각해서 그 돈을 자기 집에 쓰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 법률신문에 오래 근무하신 분께 내가 말했다. 
"친정 식구들 등쳐서 자기 배만 불리는 거잖아요."
"그 방법 밖에 없잖아. 형부가 KT에 다닌다면서. 남편이 돈벌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자기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 잘 버는 순진한 동생 이용하기가 얼마나 좋았겠어."라고 그분이 말했다.
 
그렇다. 지금의 KT는 사기업으로서 위상이 높아졌지만, 형부가 KT에 들어갔을 때에는 준공무원이라고 불릴 만큼 월급이 많지도 않고 복지도 열악했다.  그녀는 나의 등을 쳐서 부자가 되었고, 나는 가난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내 몫을 달라고 하니 받은 게 없어서 줄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세 명의 친구들에게 물었다. "KT를 다니는 사람이 10년 간 연봉 2천만 원으로 일산에 32평 아파트, 파주에 49평 아파트, 압구정 딱지를 가질 수 있을까?" 
 
한 명은 농협을 다니는 친구고, 다른 한 친구는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는 친구이다. 또 다른 친구는 가정주부로 남편이 휴대전화 개발 회사에 다닌다.  그들에게는 집이 한 채씩밖에 없다.
 
만약 KT에 평사원으로 들어갔다면 10년 동안 월급만으로 집이 세 채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의견이었다.  그런데 상속을 받았거나 투자가 대박이 났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기타의 의견이었다. 회사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월급만으로 그것도 나에게 10년간 말했던 연봉 2천으로 그렇게 재산을 불릴 수 없다는 것은 다 안다.

우리 부모님 형부의 부모님은 모두 살아 계시니 상속을 받았다는 가능성은 없고, 투자가 대박이 났다면 그것은 어차피 기록에 남는 것이니 확인이 가능할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작은 언니는 나에게 사기를 친 것이다. 언니는 사업을 하는 나에게 말했다.
"직장인은 유리지갑이야 소득이 다 잡혀."
 
그 말에는 사업을 하는 나의 소득은 현금소득을 뒤로 숨긴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작은 언니는 내 고객이 누군지 모르니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내 고객은 대부분 기관이라서 계산서 발급으로 모든 소득이 자동으로 국세청에 신고되었다. 나는 무언가를 잘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것마저 없었다면 나의 소득을 입증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의 소득도 국세청에 신고가 되어 있을 것이고, 나의 것도 그러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에게서 나의 몫을 되돌려 받고 싶다. 내가 그들에게 밥값을 낸 것은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2020년부터 드라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작은 언니의 조카 친구의 부모 중 한 명이 드라마 작가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려고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작은 언니는 대뜸 "뻔뻔스럽게 소개를 시켜달라고 하냐"라고 했다.  
 
그때 작은 언니가 조카의 친구의 과외 부탁한 적이 있는데 거절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조카 친구의 엄마는 나에게 S대기업에 다니는 남자를 소개해준다는 단서를 달았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내가 결정사에 등록을 하면 기천만원은 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은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그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려고 한다. 그것이 꼭 돈은 아니더라도.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작은 언니는 몰랐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이 없으면 몸을 써야지.", "나는 양심의 가책이 없어.", "자기들은 임대아파트에 가는 게 소원인데..." 
 
그녀가 잘되기를 위해 기도했고, 최선을 다해 도왔던  살았던 모든 시간들이 분노가 되었다. 그들이 살아야 할 마땅한 곳은 파주의 49평 아파트가 아니라 임대아파트라는 것을 스스로도 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돈 앞에 양심마저 팔아버린 그녀가 괴물 같다. 
 
엄마가 뇌출혈이 되고 식물인간 판단을 받았을 때, 퇴원하기로 한 엄마가 왜 수술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려고 작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말했다. "결과가 같더라도 나는 큰언니와 같은 생각이야." 
나는 그녀의 대답이 선의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엄마와 같은 상황에서 너의 자식들이 너와 같은 선택을 하기를 기도할 게." 
그녀는 나에게 화를 내며 악담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한 선택이 악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셈이다. 알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속이고, 나의 선한 마음을 이용한 것에 대한 나의 몫을 다시 되찾고 싶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20대와 30대에 번 돈을 기반으로 재산을 불려 나간다는 생각을 이번 기회에 하게 되었다.
내가 번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드리고 되돌려주지 않는 작은 언니에게 속아서 그럴 기회조차도 없었다. 
 
엄마는 뇌출혈이고 지금 요양병원에 있다. 어제 작은 언니가 왔다.
 
세브란스에 엄마가 입원하고 있을 때, 엄마는 작은 언니가 우리 집에 많은 것을 한다고 힘들어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비웃음이 났다. 
 
작은 언니는 엄마 앞에서 기도했다. 저 사람은 누구한테 기도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누군가 자신의 몫을 달라고 했을 때 성경적으로 대답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내 몫을 달라고 하래." 
갑자기 화를 내면서 그녀의 입에서 가장 처음 나온 말은 "네가 우리 집에서 몇 년을 살았는 데"였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다는 말을 했다. 이것이 그녀가 쓰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더니 "돈을 받은 것이 없으니 줄 것이 없어." 하고 나서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라고 했다. 
가족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말들이었다. 
 
"양심의 가책", 누군가 자신의 몫을 달라고 했을 때 양심의 가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양심까지도 속여가며 스스로 떳떳하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대답이 얼마나 이상한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녀의 본모습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이 정의인 줄 아는 어리석은 사람. 
 
그녀는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머리털을 세신 바 되시고, 일어나고 앉는 것을 안다고 하셨다. 어쩌면 그녀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을 되돌릴 기회를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경에는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모세와 아버지가 죽은 딸들이 자신의 몫을 달라고 했다. 모세가 자신의 백성을 달라고 했을 때, 이집트의 파라오는 거절한다. 열 개의 재앙 끝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준다. 아버지가 죽은 딸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몫을 분배해 달라고 했고, 당시 아들에게만 분배가 돌아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땅을 분배받는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법이다. 
 
세상에는 "품앗이"라는 개념이 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내가 같은 처지에 있을 때 돌려받기 위한 것이다. 자기의 가난함과 어려움을 안타까워서 도와준 나에게 그녀는 세상의 법도 따르지 않는다. 
 
동생에게 나는 브랜드를 빌려 주었다. 첫 번째 매장이 잘 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 매장을 열었을 때, 엄마, 큰언니와 내가 개시를 해주려고 갔다. 동생은 무슨 거지새끼 쫓아내듯 "머리 안 해도 좋으니 나가"라며 우리를 쫓아냈다. 나는 그때 내 상표를 못 쓰게 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2016년 겨울이었고, 2017년 엄마가 허리 수술하는 날 동생이 3호점을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동생에게 상표에 대한 사용료를 내거나 상표를 내리라고 했다. 동생은 사용료는 안 내고 상표를 더 이상 안 쓰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  동생은 내 말을 비웃듯 법인을 세우고 계속해서 그 상표를 사용해서 3호점과 4호점까지 계속 늘렸다. 고의에 의한 무단 사용이었다. 그리고 내 상표와 굉장히 비슷하게 상표 중 한 단어만을 고쳐 사용하다가 나중에 다른 상표로 바꿨다. 외관을 혼동시키는 상표는 법에 저촉된다. 그러고 결국 한 매장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가족이라서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20년 전에 내가 누군가와 결혼해서 30억을 벌고, 그 사람이 박사가 되게 도와주고, 브랜드를 같이 운영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나는 내 형제들 각각에게 하나씩 주었고, 그 각각은 10억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은 언니네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네가 형제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위협적인 말과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이 정의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요양병원에 있는 엄마를 매일 보러 간다. 2023년 10월 19일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스텐트 시술을 받고 뇌출혈이 왔다. 나는 울며 불며 엄마에게 그 시술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큰 언니는 네가 뭘 아냐며 자기는 전문의의 의학적 판단을 믿는다고 했다. 엄마는 뇌출혈이 되었고,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식물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요양병원으로 옮겼을 때 정말 얼마 살 지 못할 것 같았다. 엄마가 그렇게 되고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나는 정직하고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비웃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엄마가 요양병원으로 옮긴 지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욕창이 멈추고, 괴사가 멈추고, 다리를 움직이고, 눈을 뜨고 나와 눈을 맞추고, 눈동자를 움직이는 엄마를 본다.  세브란스 신경외과 선생님이 말했던 웨이크업 상태가 된 것 같아서 연락을 해 놓았지만 아직 연락이 없어 매일 같이 피가 말라 간다.
 
하루는 엄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작은 언니와 함께 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내가 번 돈을 엄마에게 주었을 것이고, 엄마는 그것을 차곡차곡 모아 나에게 돌려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몇십 억 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엄마는 저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돈 앞에서 동생도, 엄마도 보이지 않는 그녀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녀는 사람들의 사정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자신의 몇 천 원을 아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시간과 큰돈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2020년부터 나는 드라마 공부를 하고 있다. 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쓴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년 동안 논문을 번역했다는 것은 사실에 기초하고 그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공부해 온 것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말을 입말로 바꾸는 데만 꼬박 2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 부족하고, 그래서 계속 노력 중이다. 
 
나는 작은 언니의 조카 친구의 부모 중에 드라마 작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분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작은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뻔뻔하게... 소개를 부탁하냐고."
 
그런데 한 선생님은 나에게 현업 작가분을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나는 내 작품의 문제를 지적받을 수 있었고, 나는 오늘도 나의 문제점들을 고쳐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내 형제도 아닌 분들은 기꺼이 나를 도와주시려고 노력하신다. 그분은 나에게 드라마의 분석이 끝나면 찾아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분을 찾아갈 실력이 아직 아니라고 판단하기에 오늘도 노력 중이다. 몇 달 전에도 단톡방에서 준비가 되었냐고 물어보셨다. 그분은 실제로 정말 대단한 분이시고, 나에게 일자리를 주시는 것은 그분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어설픈 실력이 그분께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냥 감사하다고만 인사드렸다. 
 
드라마를 공부하기 시작한 때부터 열 편을 습작했고, 책 번역을 열 권 했다. 내가 번역한 책들은 교보문고에서 팔리고 있다. 감사하게도 중고등학교에서 많이 봐주시고, 기업들과 기관들에서도 봐주시고, 해외에서도 봐주신다. 나의 이 작은 노력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나의 작은 노력들이 잔근육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발전 속도가 비록 눈에 띄게 현저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작은 노력들이 결국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그것이 이제껏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앞으로 살아갈 방식이다. 
 
작은 언니가 나에게 보인 태도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 속에서 작은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작은 언니는 남을 속여서 자기 잘 사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남 잘 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다. "후안무치한 사람!" 그녀는 자기에게 해야 할 말들을 나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뻔뻔하고", "이상하고", "상식이 통하지도 않고"... 와 같은 단어들이 자신에게 해야 하는 말을 나에게 투사했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그렇게 살아야 대한민국에서는 잘 사는 것일까? 
 
큰언니는 자기가 얼마나 좋은 언니였는지 작은 언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그 나물에 그 밥에게 안 물어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과연 그들이 나에게 좋은 언니들인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형제들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길래 "형제 없이 네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말을 그토록 뻔뻔하게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엄마는 항상 말했다. 엄마가 없으면 언니들이 엄마를 대신할 거라고... 과연 그들이 엄마를 대신할까? 엄마에게 한 것은 나에게 몇 배가 되어 돌아왔다. 큰언니에게 돈으로 한 것은 그만큼 돌아왔지만 나에게 몇 배는 더 했다는 허상이 돌아왔고, 내가 그녀에게 한 노력은 없어졌다.   
 
작은 언니에게 한 것은 하나도 안 돌아왔고, 내가 한 노력 또한 잊혔다. 오히려 내가 작은 언니네에서 얹혀산 사람이 되었다. 뒤돌아 보면 자신과 남편의 무능을 친정 식구들로 메우고,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능력인 양 과시했다. 그렇게 친정 식구들을 이용하기 위해 형제들을 두치 혀로 형제들을 이간질하고 갈가리 찢어놓았다.  시간이 지나니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보인다. 내 언니가 아니었으면 말도 안 섞었을 사람인데... 항상 명분이라는 것을 입에 달고 사는 그들 부부는 이 일에 대해 어떤 명분을 달지도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몫을 작은 언니에게서 되찾고 싶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것을 마치 자기의 노력의 대가인 것처럼 착취해서 잘 먹고 잘 산다. 반면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다. 솔직하게 나는 어떻게 내 몫을 찾아올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나를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에게서 내 몫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실 분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신당한 신뢰, 무너진 가족애, 그리고 정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이 이야기를 많이 퍼뜨려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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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을 느끼게 되는 사람